top of page

제목         서리 (Jack Frost)

장르         연극 (Theater)

역할         공동창작, 배우 (Co-Creation, Actor)

런타임      60분

장소          성북마을극장

a11721_e66345cc41b94878835fa217f11d7a9c~

관객리뷰

서리는 기온이 어는점 아래로 내려갈 때 공기 중 수증기가 하얗게 얼어붙은 것에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얕게 깔린 서리들을 발견한 아침이면 아이들은 마치 밤새 눈이라도 내린 줄 알고 신기해한다. 눈보다 두텁지 못한 것. 지표에 조금의 온기라도 다시 돌아오면 눈보다 더 빨리 녹아 사라질 밤사이 추위의 여린 흔적. '서리가 내렸다' 라는 말은 그래서, '눈이 내렸다' 라는 말보다 먼저 사라지는 말, 그래서 더 절실한 말인지도 모른다. 다가올 일상의 온도에 따라 자연히 사라지는 일이 곧 서리의 일이다. 차라리 온 몸으로 겨울을 증언하는 눈이었다면. 하지만 뭉쳐진 눈처럼 손에 움켜 쥘 수도 없는 서리는 다시 자신 본연의 몫을 생각할 따름이다.

 

연극 ‘서리’는 그런 기억들, 서리처럼 잠시 추위에 못 이겨 나타났다가 아침이 되면 사라져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그 위에 발자국 한 번을 남길 수 없는 연약한 기억들이 힘겹게 모아질 때의 어렴풋이 비춰지는, 혹은 빚어지는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힘겹게 모아질’ 기억들이라 말한 이유는 이들 기억들이 자주, 그리고 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억은 늘 유죄이기 때문에 그 결과 무력이라는 독방에서 기울어진 창밖을 바라볼 따름이며, 이러한 무력함은 다시 그들이 받게 될 유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라도, 빛은 창문을 통해 가끔 비출 뿐이며 내가 빛의 출발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도, 이들은 서리이기 때문에, 창 밖에서 비춰 들어오는 일말의 빛조차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운 것이 된다. 연극의 각 기억들은 이따금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거나 고개를 숙인다. 기억들은 이제 죽음의 독방이라는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서로를 시체로 취급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경우는 상대를 눌러 쓰러뜨리는 것을 넘어, 시체 외형선을 긋고, 뼛가루를 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이토록 잔인하고 무거운 죽음의 무한 굴레 자체에 대한 경멸이 한계점에 도달하면, 죽음의 충동은 커튼을 젖혀 버리고 만다. 일순간 감춰있던 빛들이 모든 기억들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환하게 침투해 들어오지만, 서리에게 있어 커튼을 젖히는 이 행위는 희망의 몸짓이 아닌 진멸(殄滅)의 몸짓이다.

 

나는 진정 이 극은 커튼을 여는 이 행위로써 이들의 죽음을 보여줬다고 믿는다. 죽음의 독방에 갇혀 방향 없는 괴음만 쏟아내던 기억들이 기어이 그렇게 죽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연극 ‘서리’가 바로 이 죽음을 보여줬기 때문에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고비를 재간을 발휘해 우회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든 뚫고 가려는 몸짓을, 자신이 서리처럼 나약한 존재임을 외면할 수도 쉽게 극복할 수도 없는 이들이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빛처럼 자신에게 침투하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말이 되려는 몸짓(이들의 낭독모임처럼)을 보여줌으로써, 연극은 빛을 두려워하던 서리의 존재가 빛의 출발점이 되는 가능성을 힘겹게, 보여준다.

 

극의 두 번째(이지 마지막) 커튼이 젖히는 장면에서 모두가 ‘함께’ 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은 앞서의 죽음을 지나 맞이하리라 믿는 희망의 모습이자, 부활의 모습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연극을 단순히 빛과 부활의 극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빛이 진멸의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의 신음을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듣기 위해 말을 걸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기억들이 우왕좌왕 서로를 스치고 때론 부딪히며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가 한 마디씩 창문을 향해 쏟아내는 장면. 그토록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속에서도 말을 걸려는 이들의 모습. 말 걸기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차고 차서 쏟아져 나오는 말하기가 아니라, 내 안에 너를 채우기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는 말 걸기임을, 차가운 밤을 견딘 서리가 건네는 말이 아마도 그런 것임을.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