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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

 

평화주의 신념으로 일체의 군사행위를 거부합니다. 또한,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문화를 강화/유지/재생산하는 군대라는 조직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을 포함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다양한 사회 불평등에 저항하겠다는 정치적 신념의 일환으로 병역을 거부합니다.

 

 

2. 내가 지닌 평화주의 신념이란?

 

가. 전쟁을 일으키고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무너뜨리겠다는 마음과 실천

나는 전쟁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와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군수산업체 그리고 사회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차별과 착취의 결과물이 전쟁을 일으키고,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쟁 없는 세상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며 군사주의를 비롯한 군대와 군수산업체, 일상에 존재하는 차별과 착취 그리고 혐오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실천을 통해 그것들을 무너뜨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가능하게 하는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전쟁을 일으키고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일상에서부터 무너뜨리겠다는 다짐과 실천. 바로 그 마음과 실천이 내가 지닌 평화주의 신념입니다.

나. 내가 지녀온/지닌 가해자성을 인식하고 반성하며 행동하는 것.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강의를 듣고, 80년 광주 518에 대한 공부를 하며 질문해 보았습니다. ‘내가 당시 총을 든 군인이었다면?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입영대상자가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기회는 3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역, 예비군 그리고 전시. 뒤로 가면 갈수록 스스로가 가진 신념을 실천하기 더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위치에 두었을 때, 나는 정말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문해보았습니다. 역시나 괴로웠습니다.

별 다른 생각과 고민 없이 당연히 가야한다고 교육받아왔던 군대를 2010년 현역으로 입대하여 12년에 만기전역 하였습니다. 전역 이 후 2013, 14, 15년 3번의 예비군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좋지 않은 기억들이지만, 현역 군인이었을 때는 별 다른 문제의식과 문제없이 복무를 마쳤습니다. 첫 예비군훈련에 가서는 2박 3일 내내 먹고, 자고, 하라는 것을 대충 하면서 지내다 왔습니다.

2014년은 인권활동을 시작하며 인권에 대한 고민을 보다 진중하게 시작했던 해였습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더 이상 나와 타인의 권리가 짓밟히는 현실 앞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격을 한다는 것이 지닌 상징과 사격을 지시하는 조직의 명령을 따른다는 행동이 지닌 정치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는 것과 그런 훈련을 시키는 조직의 부역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고민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예비군훈련에서 나는 사격훈련을 거부했습니다.

이후로도 이어진 사회운동과 공부, 창작작업 등을 거치며 군대라는 조직과 그 속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가 전과 다르게 그리고 명확하게 그려졌습니다. 그 명확한 그림의 첫 시작은 나의 가해자성을 인식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단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신체건강한 남성’으로서 다양한 일상의 권력관계 속에서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일삼았던 기억, 여성을 성적도구로 대상화하며 살았던 군대와 학창시절의 기억, 힘의 논리 폭력의 논리를 따라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했던 지난 20여년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열심히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문화에 저항하겠다고 다짐했고, 창작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시스템들을 실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상의 관계와 언어들에서부터 나의 가해자성을 인지하고, 조심하고 보다 평등한 관계를 위해 실천해야겠다는 다짐과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비군훈련이었습니다. 이미 저에게 사격훈련이란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군대라는 조직은 전쟁을 준비하고, 전시에 작전을 실행하는 조직이었습니다. 동시에 힘의 논리와 폭력이 일상화되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했던 군생활에 대한 기억과 그러한 군내 문화가 우리 사회의 문화와 닮아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문화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군사주의에 저항하겠다는 신념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예비군훈련을 거부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하루 몇 시간 또는 며칠의 시간만 감내하면 치루지 않을 재판과 벌금, 실형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결국, 세 번째 예비군훈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훈련을 받으러 가는 길에 SNS에서 공유했던 글을 여기에서 한 번 더 복기하고자 합니다.

“나는 가해자다. 특히 오늘은 조금 더 특수한 곳으로- 강간을, 살인을, 성추행을, 소통의 부재를, 비리를, 비인간적인 문화를- 그 곳이 유지되도록, 충실히. 침묵/방관/용인/실행/외면/망각/거짓말을 하러 간다. 균열이 되지 못하고, 내가 모래가루든 돌멩이든 간에, 그래서 눈앞이 바뀌냐 안바뀌냐와 무관하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훈련을 받으러 가는 길에, 훈련기간 내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끊이지 않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양심은 양심에 따르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과 수치에도 작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때, 뼈저리게 알 수 있었습니다. 군대의 일원이 되어 예비군 훈련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비단 전쟁피해자뿐 아니라, 군사주의와 결탁하여 존재하는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문화 속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가해를 자행하는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때, 나는 나 스스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괴로움의 시간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지닌 가해자성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마음. 그리고 반복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실천. 이것이 내가 지닌 평화주의 신념입니다.

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에 대하여

 

전쟁을 비롯한 모든 불평등의 구조와 문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 그 길을 가는 여정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병역거부 또한 평화의 길을 걷는 하나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평택 미군기지 건설에 저항했던 사람들, 국가 폭력에 의한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유가족과 생존자 및 활동가들, 불합리한 핵발전소 건설을 막고 송전탑 뽑아내기 위해 싸우는 밀양의 주민들, 오늘도 사드에 맞서 사드 옆에 살아가고 있는 소성리 주민들,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활동가들, 숙의형 민주주의 무시하고 영리병원 진행한 도지사를 규탄하며 생명과 안전마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소리내는 시민들, 강정해군기지에 저항하는 사람들, 노동존중세상을 외치며 싸우는 노동자들, 장애인 이동권 보장 및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존재를 각자 그리고 함께 이 사회에 드러내며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는 퀴어동지들, 누구도 쫓겨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는 철거민과 자영업자 그리고 홈리스분들 등. 권력의 부당한 행태와 자본의 횡포,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문화에 맞서는 모든 이들의 걸음걸음이 평화로 가는 길이자 평화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라. 정치적 신념에 관하여

 

‘가’-‘다’를 거치며 나온 이야기들이 내가 지닌 평화주의 신념이며, 그 신념으로 나는 병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념’ 이라는 표현을 따로 사용한 이유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평화주의 신념’ 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제한적으로 인식되고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나는 평화주의 신념으로 인해 누군가를 죽일 수 없어. 그런 연습을 할 수 없어.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없어.’ 라는 것만으로 나의 신념과 선택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한 표현이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즉,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문화에 맞서는 모든 활동이 나의 평화주의 신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평화주의 신념이라는 단어가 ‘전쟁반대.’ ‘평화주의자라면 이런 모습이어야지.’ 라는 한정된 의미와 박제된 이미지로 느껴진다는 인식에서 정치적 신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3. 내 신념과 양심의 증거

가. 전역 이후 활동 및 작업 사례

 

문서상의 주장이 아닌 직접적인 활동사례와 작업사례를 추가자료로 제출하고자 합니다. 활동내역과 당시 느꼈던 감정 및 경험들을 정리하여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이 실천을 통한 불이익들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

 

예비군훈련을 거부하기 시작한 이래 5번의 경찰조사와 1번의 검찰조사를 받았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첫 공판이 열렸던 작년 12월 18일, 법원으로 향하는 길에 서귀포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비군 훈련 거부 건으로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전화였습니다. 무수히 반복되는 훈련부과와 고발, 조사와 재판. 예술가로, 사회운동가로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 일상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직업 상 수입이 일정치 않고 2017년의 경우 600만원의 수입으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주로 창작작업을 통한 수입과 일용노동을 통한 수입들이었습니다. 수십에서 수백 또는 천만원에 이르는 벌금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실형에 대한 가정 또한 안정적인 삶과 노동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로 존재합니다. 내가 이러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이 선택을 했다는 것. 몇 시간, 며칠 쉬다 오면 된다는 훈련을 거부함으로써 법적인/일상적인 불이익들을 이미 감수하고 있고, 더 큰 제제들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신념과 양심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신념과 양심을 꺼내보이며 느끼는 감정

 

2년 전, 병역거부자 홍정훈씨의 재판을 참관하였습니다. 국가 앞에서 개인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들을 꺼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습니다. 양심, 신념이란 진실한 마음의 소리인 만큼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해야하는 그 무게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양심과 신념을 믿어 줄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가진 신념과 양심을 타인이 또는 어떠한 제도가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럼에도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 시간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느낀 고민과 외로움, 허탈감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 편, 이 자료들을 작성하며 여전히 내가 나의 신념대로 살지 못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대면해야했습니다. 내 신념과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부끄러운 선택과 행동들이 내 일상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내가 가진 신념과 양심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다는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수치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때문에 이 의견서를 작성하고 추가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 더욱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들이 나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추가하는 이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허탈했습니다. 마치 무죄판결 받기 위해 나의 활동과 작업으로 이력서를 채우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삶을 도구화하는 것 같은 기분에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개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과정에서 해야만 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마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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