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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피아노 프리즘 (Piano Prism)

장르         커뮤니티 시네마 (Community Cinema)

역할         감독, 공연 오재형│기획, 포스터 디자인 이상│주최, 주관 이상의 이상│후원 강정평화상단, 재)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인디그라운드,

                영화진흥위원회

장소         강정평화센터

피아노 프리즘 웹포스터.png

이상의 이상은 2024년 6월 24일 제주도 서귀포 강정평화센터에서 오재형 감독의 영화 <피아노 프리즘> 공동체상영을 진행했습니다. 1부에서는 피아노 프리즘을 상영했고, 2부에서는 감독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의 영화 <강정오이군>을 보여주는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상영회에 참여한 30여명의 관객들과 함께 GV를 진행하며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아래의 후기는 관객 산물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

1.

 피아노 프리즘은 흰색의 건반과 도화지 위에 검은 건반과 글, 그림을 모두 초대한다. 미술을 전공한 감독 겸 주인공은 미술과 연애하다가 좋게 헤어진다. 한 번도 전시하지 않은 작품들을 은퇴작으로 영화 속에 초대한다.

 그리고 음악과 연애를 시작하는데 피아노를 치는 단조로운 일상을 화면에 그대로 담는다. 그러다가 일상 속에 만나는 사람들도 담는다. 피아노 선생님께 혼나는 장면, 피아노 선생님께 작곡을 부탁하는 장면, 집에서 혼자 설치미술을 하고 피아노를 치는 장면, 길을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에 맞춰 상상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 다른 음악가들과의 협업 등. 본인의 삶을 수면바지 입은 상태 그대로 드러내듯 일상 속 사람들도 필터없이 다양하게 등장시킨다.

 동시에 배리어프리라는 장치를 활용해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어울려본 적 없었던 것들을 장면마다 맥락에 맞추어 다르게 적용한다. 이 영화에서 배리어프리는 단순히 접근성의 차원에 한정되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적 실험 속에서 표현되어진다. 영화는 감독이 예술작업의 지평을 넓히고 실험을 모색하는 장면과 함께 장애인,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등장시킨다.

 감독은 애초에 서사를 구상하지 않은 듯 보인다. 순간순간들을 콜라쥬하듯 아무런 설명 없이 내놓는데 그곳에 모든 공감각이 적절하게 같이 놀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마치 같이 노는 것 자체가 그의 행위와 이 영화의 목적이라는 듯이.

 시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 영화는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다. 시를 좋아하는 것은 텍스트만으로 상상이 가능해서다. 이에 반해 (개인적으로 기존에 경험했던) 영화라는 매체는 모든 감각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고 느꼈고, 이 지점에서 감각이 과잉되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공감각들이 서로 양보하고 연대하며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즐겁게 노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공감각이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면 속 공연장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작품의 주체인 감독에게 객체로서만 존재하던 관객이 같은 공간과 시간에 참여하는 순간이 화면에 드러났다. 우는 관객, 웃는 관객, 어린이 관객이 등장했다. 관객들을 감상하는 관객인 나의 위치가 재미있고 신선해 그들이 울고 웃는 표정에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서 영화에 나오는 감독의 작품들과 예술이 지닌 유희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수행하고 행위하는 실험의 과정들을 보면서 나는 ‘삶을 가볍게 유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서사가 아닌 그러한 순간순간들로 엮어 구성된 이 영화는 어떤 한순간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감독과 작품, 관객이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구조 자체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는 해체의 구조 자체를 깨는 새로운 기류이다.

 

2.

 감독은 인사도 없이 관객석에서 일어나 피아노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피아노는 으레 정적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관객은 격식을 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를 관객과 함께 바라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공연자로서, 배경음악으로서, 또 다른 하나의 관객으로서 같은 공간에서 다른 관객들과 마주한다.

 영화에서는 제주해군기지와 강정오이군이 등장하더니 바로 며칠 전 죽었던 중덕이가 살아서 오이군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 내가 사는 마을이 등장하는 것이 반갑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들여다봐 준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사자이자 동시에 관찰자인 관객의 입장에서 감각할 수 있었다. 감독이 오이군과 해군기지를 방문하고 난 이후, 그동안 믿어왔던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해 아파하는 지점도 공감이 갔다.

 이전의 나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그래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현실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집에 가는 길은 눅눅해진 팝콘처럼 헛헛했는데. 이날 상영회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프레임 안과 밖에서 구성원이 되었던 순간, 그 순간이 모든 것을 무색하게 했다.

 

3.

 행사가 끝나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감독과 친하지도 않은데 뒷풀이에 참여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다양한 예술작업을 기본기부터 기술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혼자 외롭지 않으세요?” 물었더니 취기에 얼큰하게 얼굴이 붉어진 감독은 원체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고 했다. “예술을 왜 하세요?” 라는 어렵고 근원적인 질문을 했을 때의 답변은 “그냥 재밌어서”였다. 나는 내 삶에서 예술을 취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예술에 다른 조건들이 붙는 순간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은 예술 작업과 함께 그 많은 일들을 수행하면서도 재밌어죽겠다고 한다. 본인의 삶 자체를 갈아넣을 수 있는 행위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예술가 개인만의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예술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 행위의 당사자에게 즐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없는 예술, 타자를 염두해두는 예술은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목적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과정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다. 오재형 감독은 그냥 다양한 것들과 같이 노는 것은 아닐까? 아끼는 마음으로. 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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